
코로나19 사태로 확산된 비대면 문화는 전국민의 생활반경과 행동양식을 바꿔 놓았죠. 작년2020년 초부터 우리는 이제 당장 본질적으로 하고자 한 것들에 대해, 그게 디지털 온라인 가상 세계에서도 유효하고 원활할 것인지 고민하게 됐습니다. 우선순위가 달라진 겁니다. 일상을 지속하는 데 어려움이 닥쳤으니 더 이상 본질적이지 않은 것을 해내려고 애쓰지 않으려는 거죠. 조만간 그런 게 있었다는 사실조차 대체로 잊고 지내게 될 수 있습니다. 이미 잊힌 것도 있고요. 행정공공기관에서 치르는 행사 서두에 빠지지 않았던 국민의례도 그렇게 조용히 잊히는 중 입니다.
새삼스럽지만 국민의례가 뭔지 잠깐 짚어 보죠. 절차와 형식을 우선 볼까요. 우선 행사가 열립니다. 참석자들이 모이고요. 그리고 행사를 시작하기 위해 국민의례부터 하겠다고 사회자가 말하죠. 그러면 참석자들은, 앉아 있던 사람들은 일어나고, 선 사람들은 이제 거대한 태극기를 향해 모두 돌아서죠. 한 쪽 가슴팍에 손바닥을 얹은 채 국기에 대한 맹세를 읊습니다. 악대가 연주하는 반주에 맞춰 애국가를 제창하고요. 이제 원래 바라봐야 할 방향으로 되돌아서고, 다시 자리에 앉죠. 비로소 사람들이 모인 목적에 맞는 행위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고요.
이 과정에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의 무게와 깊이에 따라 여러 등급별로 심화 절차들이 또 있습니다만, 공통점은 이겁니다. 행사 자체의 내용과는 별 상관이 없다는 것. 단지 정부부처, 공공기관, 지방자치단체, 이런 정부와 국가의 이름으로 마련된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한다는 것.
정신적인 부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국민의례는 어쨌든 사람들이 실물로 대면하는 자리에서 지금 나라의 이름을 걸고 공식행사를 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음을 새삼스럽지만 강조하고, 이렇게 할 수 있도록 고초를 감수하며 힘써 준 여러 선조와 위인들에게 감사와 존경을 보내는 구체적인 행위죠.
작년 3월에 제101주년 3·1절 기념식이 종로구 배화여고에서 열렸습니다. 당시 정책브리핑 뉴스에 따르면 이 행사가 코로나19로 비롯된 국가적인 위기 탓에 상당 부분 축소된 규모로 진행됐고, 각 지자체 차원에서 준비된 기념식들은 그마저도 취소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과 정부 인사들이 국민의례를 진행한 것을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올해 3월에도 종로에서 제102주년 3.1절 기념식이 오프라인으로 열렸고 대통령과 참석자들은 역시 국민의례를 했죠. 온 나라가 코로나19로 난리지만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이에 대해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어찌됐든 의미가 있고 중요하다는 공감대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 지점에서 벌써 일반 국민들과의 괴리가 크죠. 이 국민의례를 마지막으로 직접 행했던 게 언제인지 기억나는 사람이 있을까요. 대다수 사람들은 아마 지난 1년 7개월동안 국민의례를 할 일이 전혀 없었을 거예요. 그럼에도 실제 삶과 인생에 그로 인한 어떤 불편과 소외도 경험하지 않았을 테고요. 당연한 일입니다. 직장에서 조상과 위인을 기릴 일이 보통은 없죠. 제 기억에 학생 때 그나마 학교에서 국민의례를 종종 했는데, 전국 1년 반동안 평범한 등교조차 제대로 못하는 상황이잖아요. 군, 치안, 소방은 그렇다치고 의료보건 쪽은, 종사자 분들이 지금 독립운동하듯이 방역 실무를 담당하고 있죠. 대부분의 일반인들에게 국민의례는 기록으로만 존재하는 사건이 된 것입니다.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봅니다. 요즘 들어 민간기업 또는 공공기관에서 ‘개더타운’을 종종 쓰는 모양인데요. 비대면 협업툴 중 2차원 롤플레잉 게임같은 가상세계 공간에서 아바타 캐릭터를 움직여 사람들과 상호작용하고 디지털로 이벤트를 기획, 구성, 실행할 수 있는 메타버스 서비스죠. 개더타운으로 맵을 만들고 그래픽을 추가해서 아기자기한 느낌으로 행사공간을 구현하는 시도는 좀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과 같은 기관이 비대면 발표회를 진행한 적이 있고, 국내 정보통신기술 분야 기업들의 해외진출을 돕기 위해 투자자들과 비대면 상담 기회를 마련하기도 했어요. 다행히 아직까지는 이런 방식으로 실행된 이벤트에서 국민의례를 시키겠다는 광기는 발현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굳이 이런 가상세계를 활용하지 않더라도 네이버TV나 유튜브 채널로 영상송출을 통해 진행하는 온라인세미나 형식의 행사에서도 국민의례의 흔적은 잘 보이지 않더군요. 물론 오프라인 참석자들과 함께 진행하는 행사를 실시간으로 중계하고 있을 땐 작년과 올해 3.1절 기념식처럼 국민의례 장면이 나올 수 있죠. 그게 아니라, 실제 참석자가 없이 별도로 마련된 무대나 연단에서 사람만 등장하는 온라인세미나에선 국민의례를 하지 않죠. 여기에 애국가 제창이니 국기에대한 맹세니, 순서를 만들어서 굳이 하려면 할 수 있지만요. 실시간 중계라면 대단히 어색한 그림이 나올 것이고 녹화 영상이라면 참석자들의 가차없는 ‘건너뛰기’나 이탈을 조장하고 말 거예요. 아직까지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은 게 다행입니다.
디지털 세계에서 국민의례라는 의식은 거대한 시간낭비일 수 있어요. 코로나19 시대의 비대면 소통과 온라인 행사의 여러 기술적 환경이 갖고 온 조건을 감안했을 때 그렇다는 얘기죠. 이걸 기존 오프라인 행사와 동일한 포맷으로 계승하겠다고 하면, 코로나 이후 살아남지 못한 것들 목록에 등재되겠죠. 뭐 한 5만년쯤 뒤에 한반도 현생인류를 연구하는 학자들한텐 이 땅의 대면·단체활동이 코로나19 사태로 절멸당하기 전 시대, ‘선코로나기(pre covid-19 period)’의 상징처럼 정의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국민의례 자체의 목적이나 의도를 살릴 필요는 있을 것 같아요. 정부가 디지털 시대에 걸맞는 형식과 방법으로 국민의례를 재정의해 봄직하죠. 청와대에서 어린이날 마인크래프트 세계 속에 창조한 디지털 청와대에 어린이 국민들을 초대해 즐거움을 준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고민이 필요하지 않은가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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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2 [Covid-19 killed the national ritual]이라는 제목으로 초고 작성. 210829 본문 내용 보완, 편집, 제목 변경해 북저널리즘 저널에 게재. 241110 개인 블로그에 비공개로 옮김. 250302 삼일절 이튿날 밤 공개로 전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