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놓인 데스크톱 컴퓨터를 오랫동안 쓰다 보니 여러 문제를 맞딱뜨려 왔다. 그 중에 불규칙한 시스템 멈춤 현상(freezing)은 내게 가장 까다롭고 당혹스러운 현상으로 기억될 것이다. 문제를 건조하게 요약하면 아래 문장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한동안(대략 하룻밤 이상) 쓰지 않았던 컴퓨터를 새로 작동시키면 반드시 멈춘다. 그런데 켜서 일정 시간 전원을 공급받고 있던 컴퓨터를 멈춘 대로 놔뒀다가 재부팅하면 문제가 사라진다. 그러나 컴퓨터를 재부팅하기 전까지 내버려 둔 시간이 너무 짧으면, 문제가 사라지지 않아 다시 멈춘다.
아래는 지난 다섯 달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원인을 추정하고 각각이 실제일 경우 효과가 있을 거라 기대하며 실행에 옮겼지만, 헛수고였던 일의 목록이다.
- USB 인터페이스 기반 주변기기 연결 해제 및 재설치
- 오디오 및 그래픽카드 드라이버 최신 버전 재설치
- 윈도 운영체제 최신 업데이트 설치
- CPU 쿨러 교체 및 CPU 써멀그리스 재도포
나와 비슷한 문제를 겪은 사람이 마이크로소프트 커뮤니티에 올린 글이 있었다. 이 사람도 댓글로 여러 해법을 제안받았지만, 짐작컨대 결정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한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대략 보름 전쯤에 아무 기대 없이 새 컴퓨터를 살 때가 됐구나 생각하며 그냥 어디서 본 얘길 따라 해 봤는데 거짓말처럼 효과를 본 방법은 아래 딱 하나다. 농담이 아니다.
메인보드에 비교적 수시로 빼고 꽂았던 부품의 인터페이스 금속부 양 쪽을 연필 글씨 지우는 ‘지우개’로 문지른 뒤 메인보드에 재조립한다. 내 컴퓨터에선, PCI-e 그래픽카드 1개와 DDR3 메모리모듈 4개가 그런 부품이었다.
이 조치를 취하기 전에 온갖 조치를 상상해 봤다. 전원공급장치 교체, 메인보드 교체, CPU 교체, 메모리 교체, 그래픽카드 교체, 윈도 운영체제 재설치, 메인보드 바이오스 따위였다. 이가운데 어떤 것도 실행에 옮겼다면 만만치 않은 시간과 비용을 쏟았을 것이다. 아무 효과를 보지 못한 채 끝났을 것이다. 어쩌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결론내리고 컴퓨터를 폐기했을 수도 있다. 아무런 경험적 근거 없이 우연히 시도한 방법이 확실한 효과를 보여 줬다는 점에서, 이번엔 운이 좋았다.
컴퓨터가 불규칙적으로 멈추는 일을 겪은 건 올해 상반기부터였다. 처음엔 지금 쓰는 컴퓨터 본체가 가장 낡은 부품 기준으로 10년 이상 된 것이어서, 하드웨어의 노화에 따른 현상이라고만 여겼다. 하지만 노화 현상이라기엔 그 양상이 기이했다. 일반적인 하드웨어 노화라면 처음 켜서 잘 동작하다가 재부팅을 해서 문제가 생긴다든지, 처음부터 문제를 보인 뒤 이따금 되돌아오더라도 정상 동작하는 식은 아닐 게다.
이 문제의 핵심은 컴퓨터가 어떤 징후를 보인 뒤 오작동 상태에 빠지는 흔한 시나리오와 반대 순서를 보였고, 이 때문에 내가 무슨 원인을 제거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더 이상 컴퓨터 멈춤이 발생하지 않는 지금도, 내가 어떤 원인을 해결했는질 모른다. 지우개질로 그래픽카드와 메모리모듈의 접촉 단자에 묻어 있던 먼지를 제거한 것은 맞지만, 그간의 현상을 먼지 탓으로만 돌리기엔 여전히 석연찮다.
컴퓨터 덕분에 또 교훈을 얻었다. 수십년을 쓰면서 스스로 수백가지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할 줄 알게 됐지만, 여전히 내가 이 물건에 대해 모르는 게 아주 많다는 것.
191101 작성 시작. 191103 편집 완료.